1898년 처형을 앞두고 촬영된 해월 최시형과 주변 공간

가장 널리 알려진 해월의 마지막 사진. 우리는 이 얼굴과 장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해월 최시형 순도 전 사진Nikolai Matyunin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기억의 장소

도시는 누구의 기억을
크게 남기는가.

한 인물을 기억하는 일은 이름을 외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머문 장소, 남은 기록,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듭니다.

시간 따라 장소 읽기 ↓

1827 — 1900

해월의 삶이
머문 장소들.

출생과 입도, 경전 간행과 피신, 체포와 마지막 안식처까지. 한반도에 남긴 그의 흔적을 통해 해월의 삶과 동학의 재건 과정이 하나의 시간선으로 이어집니다.

  1. 01

    경주 황오동

    출생과 오늘의 기념

    해월 최시형이 태어난 경주 동촌 황오리 일대와, 그의 삶을 오늘에 전하는 황성공원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해월은 1827년 경주 동촌 황오리, 오늘날의 황오동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제지소에서 일했던 그의 출발은 훗날 평민의 생활 속에서 동학을 실천한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해월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상은 러시아 외교관이 촬영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진 속 모습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곁의 부조에는 1893년 보은취회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수만 명이 참여한 보은취회는 한국 근대 민회의 중요한 선례로 평가됩니다.

  2. 02

    포항 검등골

    생활과 입도, 수행의 자리

    해월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고, 동학에 입도한 뒤 수행을 이어간 삶의 현장입니다.

    해월은 1859년 포항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습니다. 1861년 동학에 입도한 뒤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을 배우고 일상에서 실천했습니다.

    당시 집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집터를 이루던 바닥돌과 일부 담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포항시는 이곳을 ‘해월 최시형 유허지’로 지정해 지역의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3. 03

    인제 갑둔리 동경대전 간행터

    기록상 최초의 『동경대전』 간행

    흩어진 스승의 가르침을 목판과 책으로 남겨, 동학의 사상과 조직이 다음 지역과 세대로 이어지게 한 장소입니다.

    해월은 1880년 5월 인제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 각판소를 두고 판각을 시작해 그해 6월 『동경대전』 약 100부를 간행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현존본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록상 최초의 『동경대전』 간행으로 평가됩니다.

    간행에는 상주·청송·정선·인제 등 여러 지역의 동학교도가 비용과 노동을 보탰습니다. 간행터는 2016년 12월 2일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4. 04

    단양 용담유사 간행지

    비밀 포교와 교단 재건의 거점

    단양에 머물며 교단을 다시 세우던 해월이 우리말 가사로 된 『용담유사』를 펴낸 곳입니다.

    1871년 영해 사건 뒤 피신길에 오른 해월은 영월·정선 등지를 거쳐 1875년 단양 새두둑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약 10년 동안 단양 일대에서 비밀 포교와 교단 재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881년에는 단양 대강면 장정리 샘골, 오늘날 남천리의 여규덕 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습니다. 한문 경전인 『동경대전』과 함께 우리말 가사로 된 『용담유사』가 보급되면서 동학의 가르침은 더 넓은 민중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단양을 기반으로 한 포교와 경전 간행을 통해 충청 지역의 교세가 커지자 관의 추적도 거세졌습니다. 해월은 1885년경 다시 거점을 옮겨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5. 05

    공주 가섭암 최시형 은거지

    피신 중 수련했던 작은 사찰

    관의 추적을 피해 이동하던 해월이 의암 손병희(천도교 3세 교주), 춘암 박인호(천도교 4세 교주) 등과 머물며 수련한 곳으로 전해집니다.

    1884년 단양 장정리로 옮긴 해월은 그해 6월 관졸의 추적이 다가오자 가족을 남겨 두고 익산 사자암으로 피신했습니다. 약 4개월 뒤 단양으로 잠시 돌아온 그는 다시 공주 가섭암으로 들어갔습니다.

    해월은 이 작은 사찰에서 수련한 뒤 11월 무렵 상주 앞재 마을에서 가족과 다시 만났습니다. 가섭암은 끊임없는 피신 속에서도 수행과 지도자 양성이 함께 이어졌던 장소로 기억됩니다.

  6. 06

    원주 송골 최시형 피체지

    오랜 피신 생활이 끝난 자리

    원주 호저면 고산리 송골의 원진여 집에서 해월이 관군에게 체포된 장소입니다.

    해월은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피신하며 교단을 수습했습니다. 원주 송골의 원진여 집에 머물던 1898년 음력 4월 5일, 송경인이 이끈 병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원진여 집터와 마을 앞에는 피체 사실과 해월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작은 보따리를 지니고 곳곳을 다니며 민중과 함께 일하고 생활했던 모습에서 비롯한 ‘최보따리’라는 이름도 이곳의 기념비에 전해집니다.

  7. 07

    서울 최시형 순교터 표지석

    교수형과 오늘의 표지

    해월이 교형을 당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종로3가 단성사 터 인근에 세운 작은 표지석입니다.

    해월은 1898년 음력 6월 2일, 양력 7월 20일 교형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오늘날 종로3가 단성사 터 인근에는 서울시가 설치한 ‘최시형 선생 순교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8. 08

    여주 최시형 묘소

    두 번째 장지이자 오늘의 추모 공간

    서울에서 수습된 해월의 시신은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900년 원적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자리 잡은 묘소입니다.

    해월의 시신은 형 집행 사흘 뒤 수습되어 광주 지역에 임시로 안장되었습니다. 1900년 음력 3월 12일 여주 금사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산중턱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묘 오른쪽에는 1980년 천도교중앙총부가 세운 묘비가 있으며, 주변에는 부인 손시화와 후손들의 묘가 자리합니다. 이곳은 1986년 여주 지역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해월과 그 가족의 삶을 함께 기억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공공기억

기억은 저절로
커지지 않습니다.

연구와 고증, 표지와 전시, 교육과 접근성이 축적될 때 역사적 기억은 다음 세대에 전달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을 남기자는 공공 영역의 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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